May 2022
“논문 쓰듯 창업” 스타트업 5개 일으킨 교수님_KAIST 전기 및전자공학부 배현민 교수
“경외의 대상이다. 창업을 논문 쓰는 정도로 생각하시는 듯.”
이광형 KAIST 총장에게 전기및전자공학과의 배현민(50) 교수에 대해 물으니 돌아온 답변이다. 그는 KAIST의 엘리트 교수이면서, 학교를 대표하는 연쇄 창업가 중 한 사람이다. 미국 일리노이대 어바나 샴페인에서 박사과정 중이던 2001년 지도교수와 함께 스타트업 인터심볼 커뮤니케이션스를 창업한 것이 시작이었다. 이후 KAIST 교수 2년차이던 2010년 테라스퀘어, 2013년 오비이랩, 2016년 포인트투테크놀로지, 2021년 배럴아이를 연이어 창업했다. 모두가 연구자로서 연구하고 논문을 쓴 것을 바탕으로 사업화한 성과다.
‘회사야 나도 차릴 수 있지’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첫 창업인 인터심볼은 초당 10기가비트 속도의 통신용 MLSE 수신기를 세계 최초로 상용화한 스타트업이다. 배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을 기술사업화한 결과였다. 이 기술이 이제는 시스템 네트워크에 사용하는 범용기술이 됐다. 배 교수는 이 연구로 2006년 미국 전기전자공학회(IEEE)에서 한국인 최초로 최우수 논문상을 받기도 했다. 인터심볼은 이후 2007년 세계 최대 광통신 기업인 피니사에 인수·합병됐다.
미국 상장기업에 회사 둘 매각
귀국 후 KAIST 교수가 된 뒤 첫 창업한 테라스퀘어는 세계 최초로 1W 이하의 전력소모를 갖는 100기가비트 반도체를 상용화한 기업이다. 기존보다 전력소모를 3분의 1로 줄여, 당시 차세대 초소형 통신모듈에 탑재할 수 있는 세계 유일한 솔루션으로 평가받았다. 테라스퀘어는 2015년 이 같은 가치를 인정받아 뉴욕증권거래소 상장기업인 긱옵틱스에 인수·합병됐다.
2013년 창업한 오비이랩의 주력 제품은 ‘실시간 휴대용 고해상도 근적외선 뇌 영상장치’다. 근적외선을 이용해 뇌혈관 속의 산소농도를 파악하는 방식으로 영상을 찍어낸다. 무게가 160g에 불과하고 머리 탑재형 디스플레이(HMD)처럼 생겨서 모자처럼 간편하게 쓰기만 하면 된다. 자기공명영상(MRI)이나 컴퓨터단층촬영(CT)에 버금가는 해상도로 뇌를 실시간 관찰할 수 있다. 기존 MRI나 CT는 부피가 커서 이동이 불가능하고, 고가라는 커다란 단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장치를 한 번 이용하려면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배 교수는 “최근에는 뇌영상장치를 고도화시켜 신경과뿐만 아니라 신경외과 등 병원의 여러 분야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며 “이제 병상에 누워서 뇌의 단층촬영을 실시간으로 하는 시대가 곧 열린다”고 말했다. 현재 오비이랩 제품은 전 세계 100개 이상의 기관에서 사용되고 있다.
2016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창업한 포인트투테크는 구리선과 광케이블 대체하는 3세대 최첨단 케이블 ‘E튜브’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회사다.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인 스폰지를 전선 핵심 소재로 사용하지만, ‘도파관의 원리’를 이용해 고용량 데이터를 빠르게 전송할 수 있다.
배 교수는 “백화점에 가서 분수를 보면 분수가 물줄기를 뿜을 때 분수에 있는 전구의 빛은 직진하는 게 아니라 물줄기를 따라간다”면서 “스폰지 케이블을 분수의 물줄기처럼 선으로 만들고 고주파 신호를 원하는 쪽으로 전송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접어들면서 고용량의 데이터를 주고받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며 “구리선은 고주파에서 전력 손실이 크고, 광케이블은 비싸다는 단점이 있지만, E튜브는 이 두 가지 단점을 모두 극복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활용한 초음파 장비 개발
배 교수는 포인트투테크의 창업주이지만, 직접 경영에 나서지 않고 이사회 의장 역할을 맡고 있다. 회사의 최고경영자(CEO)는 배 교수의 서울대 전기공학과 학부 동기이면서,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에서 10여년간 통신 관련 경험을 쌓은 박진호 대표가 맡고 있다. E튜브는 기존에 없는 획기적인 기술인만큼 글로벌 시장의 관심을 한몸에 받고 있다. 최근까지 실리콘밸리를 비롯한 국내외 다수의 투자자로부터 400억원을 투자받았다. 또 글로벌 유명 기업들이 포인트투테크 제품의 위탁생산을 희망하고 있다.
2021년 창업한 배럴아이는 ‘정량적 초음파 진단 장비’를 연구·개발하는 스타트업이다.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MRI처럼 인체조직의 정량값 추출을 할 수 있는 혁신적인 초음파 장비를 연구, 개발하는 기업이다. 기존 초음파 장비에 배럴아이의 소프트웨어를 장착하기만 하면 종양의 종류, 간의 지방 수치 등을 실시간으로 받을 수 있다.
미국에서 첫 스타트업을 시작한 배현민 교수의 연쇄창업엔 어려움이 없었을까. 그는 한국에 와서도 창업을 하고 싶었지만 2009년 KAIST에 교수로 임용된 뒤에는 ‘교수는 연구하고 논문을 쓰는데 전력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학계 풍토 때문에 창업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배 교수는 “당시만 해도 KAIST에선 교수가 논문에 초점을 맞추고 창업을 극히 주저하는 분위기였다”며 “그렇지만 창업을 통해 배웠던 소중한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나의 소명이라 판단해 두 번째 창업에 도전했다”고 회상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창업인 인터심볼·테라스퀘어를 매각했지만, 배 교수는 여전히 3개 스타트업의 창업주 겸 최대 주주다. 특히 최근 창업한 배럴아이는 그가 직접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KAIST 현직 교수이면서 3개 회사를 운영하다 보니, 배 교수는 1분 1초를 아끼며 산다. 월~목요일엔 대전 KAIST에서 강의하고, 석박사 학생 20명을 지도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금요일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강남 테헤란로 세 곳에 기업을 둔 창업가로 변신한다.
이광형 KAIST 총장 “경외한다”
교수가 대학에서 1인 3역을 해도 모자랄 판에 왜 창업을 하는 걸까. 배 교수의 대답은 명쾌했다. 그는 “창업은 딥테크 기술을 완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거쳐 가는 단계”라며 “연구자들이 고민해서 인류의 삶에 도움이 되는 딥테크 기술을 만들더라도 논문을 작성하는 것에서 끝난다면 그 기술은 사장되고 만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처럼 기술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다른 누군가가 내 기술의 가치를 알아보고 상업화까지 이끌어 가주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라며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누군가는 그 기술을 한 차원 높은 곳까지 가져가야만 상업화를 할 수 있고, 그 과정을 이끌어가야 하는 사람은 연구자 자신뿐”이라고 했다.
현직 공대 교수의 다섯 번의 연쇄 창업은 이광형 KAIST 총장이 ‘경외’라는 단어를 쓴 것처럼, 시쳇말로 ‘넘사벽’이다. 그는 연쇄 창업의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학생들과 새로운 기술들을 연구하고 그 결과가 충분한 사회적 기여가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그 기술을 저와 함께 만든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창업과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렇다 보니 새로운 기술이 완성되는 약 3~4년 주기마다 새로운 창업이 이뤄지게 된 겁니다. 지금도 계속 새로운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니까 앞으로도 우리 연구실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창업이 계속 이뤄지리라 생각합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수업과 연구를 병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그는 “회사를 창업하면 초기에 적합한 전문경영인을 찾고 투자를 끌어내는 부분까지는 제가 주로 하지만 그 이후는 다시 연구 개발의 업무로 돌아온다”며 “회사를 창업하지만 내 임무는 연구개발이라는 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별다른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오히려 창업하게 되면 그 분야의 문제와 상황을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어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고 즐거워했다.
미국 대학에서도 드문 케이스
학생들의 생각도 배 교수와 같을까. 국내 유일 대학원 연구실 평가 사이트인 ‘김박사넷’에 들어가니 랩(연구실) 분위기를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연구실 분위기와 교수의 인품, 강의 전달력, 실질 인건비, 논문지도력 등 5가지가 모두 A+와 B+ 사이에 고르게 분포돼 있다. 교수에 대한 신랄한 평가가 수시로 올라오는 ‘한줄평’도 칭찬 일색이다.
미국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엑셀러레이터 펜벤처스의 송명수 대표는 “배 교수처럼 학계에 있으며 본인의 연구를 바탕으로 연쇄창업을 한 뒤 성공적으로 매각하고, 또다시 기업을 운영하는 경우는 미국에서도 흔한 케이스가 아니다”며 “배 교수의 사례가 한국 사회의 R&D기반 기술 사업화의 중요한 롤 모델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송 대표는 “명문 MIT의 교수로 일하면서도 50개가 넘는 바이오 스타트업을 창업한 누바르 아페얀 모더나 회장 같은 사례가 한국에서도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