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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ptember 2021

염색없이 새치를 검게…카이스트 교수 개발 '마법 샴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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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7월 과학저널 네이처 표지에 커다란 홍합 그림이 실렸다. 물속 미끌미끌한 돌이나 유리, 선박 표면에도 착 달라붙는 홍합 원리를 활용한 접착제에 관한 연구였다. 보통 접착제는 물이 닿으면 접착력이 약해지지만 홍합은 오히려 물속에서 더 잘 붙는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쳐도 끄떡없이 바위에 붙어 있다. 홍합 하나가 견디는 무게는 125㎏에 달한다.

홍합의 강력한 접착력에 대한 연구가 약 15년 후에 샴푸로 재탄생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논문 제1저자였던 이해신 KAIST 석좌교수(48)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 샴푸는 염색을 하지 않고도 꾸준히 사용하면 새치를 검게 만들어준다. 최근 품절 대란으로 구입조차 어렵다는 '모다모다 프로체인지 블랙 샴푸' 얘기다.

개발자인 이 교수는 홍합 연구를 시작으로 이후 '폴리페놀'이라는 한 우물만 팠다. 폴리페놀은 탄소가 육각형 형태로 연결된 벤젠고리에 수산화기(OH-)가 붙어 있는 구조를 여럿 갖고 있는 분자를 통칭한다. 일반적으로 항산화물질로 많이 알려져 있는 폴리페놀은 홍합이 보유한 강한 접착력의 근원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매일경제와 인터뷰에서 "홍합을 시작으로 폴리페놀 접착력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산소와 접촉하면 색이 짙은 갈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보니 2016년께 문득 샴푸를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당시 이 교수는 폴리페놀의 접착력으로 수도관, 배관 등의 누수를 막는 '실런트'에 대한 논문을 쓰고 있었다. 이 교수는 "수도관이 샌다는 것은 이 부분이 공기에 노출된다는 것인데, 여기에 고농도 폴리페놀을 뿌리면 폴리페놀이 산소·수분과 접촉하면서 순식간에 누수를 막아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같은 원리로 단백질인 머리카락에 접착력이 강한 폴리페놀이 붙고, 이후 공기와 접촉해 색이 변한다면 머리색을 검게 해주는 샴푸가 될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이 아이디어를 머릿속에만 남기지 않고 바로 실행에 옮겼다. 빈 용기를 구입해 폴리페놀을 넣은 샴푸를 실험실에서 만들어 지인들에게 나눠줬다. 화장품 제조·유통을 하고 있었던 배형진 모다모다 대표도 이 샴푸를 받은 지인 중 하나였다. 제품을 사용해 본 배 대표는 같이 샴푸를 개발해 선보이자고 이 교수를 설득했다. 이 교수는 "실험실에서 샴푸를 만들어 볼 때까지만 해도 이게 사업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며 "은퇴하고 나면 대전 시내에서 수제 샴푸 매장을 할 거라는 농담만 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하지만 5년간의 추가 개발 과정을 거쳐 탄생한 샴푸는 없어서 못 사는 인기 제품이 됐다. 4주간 꾸준히 머리를 감으면 염색 없이도 흑갈색으로 머리카락 색이 변한다는 입소문을 타고 새치로 고민하는 젊은 층부터 노년층까지 이 제품을 찾고 있다. 모다모다 측은 올해 하반기에 이 샴푸 매출만 200억원, 대량 생산과 해외 진출이 본격화하는 내년 매출은 3000억원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샴푸 속 폴리페놀 성분은 모발의 가장 바깥 부분 표피인 큐티클층에 달라붙는다. 특히 큐티클층이 손상된 머리카락일수록 폴리페놀이 달라붙기에 좋다. 새로 나온 두피 쪽 새치보다 모발 아래쪽 새치 색이 빨리 변하는 이유다. 이 교수는 "그렇다고 머리카락이 손상돼야만 갈변된다는 의미는 아니다"며 "샴푸를 하는 행위에도 큐티클층은 살짝 일어나게 되는데, 이 정도만 돼도 폴리페놀이 붙는다"고 설명했다. 처음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폴리페놀이 '씨앗'이 되고, 여러 번 샴푸를 거듭할수록 이 씨앗에 새로운 폴리페놀이 붙으며 점점 짙은 색이 나온다.

폴리페놀의 활용 방안은 무궁무진하다. 샴푸만 해도 흑갈색뿐만 아니라 카키색, 붉은색 등 원하는 색을 낼 수 있는 다양한 발색 샴푸를 추가로 개발할 계획이다.

폴리페놀 특성을 활용해 이 교수가 개발한 '찔러도 피가 안 나는 주사'는 식품의약품안전처에 허가를 신청한 상태다. 주삿바늘로 피부를 찌르면 피가 나지만, 이 교수는 주삿바늘 표면을 폴리페놀 성분 접착제로 코팅해 바늘이 피부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바로 지혈이 이뤄지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감염병 환자의 혈액으로 인한 2차 감염을 막아주기 때문에 코로나19 환자들을 치료할 때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이 교수는 관련 연구로 2018년 10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선정하는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받기도 했다. 같은 원리로 만든 지혈제는 2015년 이미 국내에서 상용화됐다. 이 교수는 "폴리페놀을 뿌려줄 경우 순간적으로 산소를 차단하기 때문에 소화기에도 활용할 수 있고, 유조선 기름 유출 현장에 뿌리면 폴리페놀이 기름에 달라붙어 건지기 어려운 액체 상태 기름을 막 같은 형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에 건지기 쉬워진다"고 덧붙였다.